? 다일공동체 다일 커뮤니티 다일의 영성이란 학술적 의견




다일영성수련

전창근 목사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MATS)
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Ecumenical D.Min, 영성전공

들어가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다일공동체와 최일도 목사는 청량리 588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퍼주는 밥상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일공동체는 최초의 개신교 무료병원인 다일 천사병원을 통해 의료사각지대에 있는 이 땅의 소외된 이웃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다일공동체가 ‘나사렛 예수의 영성을 추구하는 영성공동체’임을 간과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2009년 11월 17일부터 21일까지 미국 애틀란타에 있는 다니엘기도원에서 있었던 다일영성생활 수련 미주 9기에 참석하기 전까지 다일공동체에 대한 나의 이해도 위와 마찬 가지였다.
하지만 이때 다일영성생활 수련을 통한 다일영성수련회와의 만남은 내 삶과 영성의 중대한 전환점의 시작이 되었다.
무엇보다 다일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져 가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일공동체가 추구하는 영성의 열매이며, 그 뿌리가 바로 다일영성생활 수련에 있음을 시간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깨달아가고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영성은 정의를 내리기가 매우 어려운 단어이다. 사실 영성이란 말만큼 다양한 함의를 지닌 단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성에 대한 정의는 영성신학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데, 그것은 사람마다 영성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성에 대한 매력이기도 하다.
영성은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삶이 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단어 앞에 기독교라는 말로 수식이 될 때 좀 더 구체성을 가지고 크리스챤인 우리에게 다가온다.
영성신학자, 마이클 다우니(Michael Downey)는 기독교 영성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의 한 방식”으로 정의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기독교 영성은 보이지 않은 초월의 세계에 대한 그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에서 그 현재적 삶은 “성령의 임재와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 영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뿌리내린, 성령안에서 그리스도인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태도”라고 본다.
이러한 기독교 영성에 대한 이해는 자신과 이웃과 우주와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응답을 요구한다.
기독교 영성을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인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과 태도”라고 이해할 때,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그 나름의 독특함이 있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아래와 같이 5가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특한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침묵수련을 지향한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침묵의 영성에 물줄기가 잇대어 있다.
한국 개신교 영성이 소홀히 여겼던 “침묵의 힘”을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강조한다.
침묵(silence)은 언어다.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는 언어이다.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the presence of God)를 알아차리게(noticing)하는 하늘의 언어이다.
다일영성생활 수련 1단계는 침묵에 익숙하지 못한 벗님들을 위해 외적침묵을 강조한다.
2단계와 3단계는 외적침묵을 넘어, 내적침묵으로 그리고 완전한 침묵 안에 머물도록 수련한다.
침묵 없이는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은 그 자체로도 좋은 영성수련이 되지만 다일영성생활 수련에서 특별히 침묵을 강조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이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가슴으로 경험되어 지는 앎을 지향한다.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첫 머리에서 "앎" 특히 하나님에 대한 앎과 나에 대한 앎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물론 존 칼빈이 말하는 “앎”은 머리로 아는 앎(information)을 말하지 않는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 같이 경험되어지는 앎이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는 기독교에 대하여 머리로만 아는 앎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가슴으로 내려오질 않는다
.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머리로 아는 앎(정보, information)이 아니라 가슴으로 경험되어 지는 앎(변화, transformation)을 지향한다.
이런 이유로 다양영성생활 수련은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 "마음으로의 여행" ”내가 나를 만나는 여행” 이라고 불리어진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삼위 일체적으로 균형 잡힌 영성을 지향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영성적 경험은 영성의 한쪽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오직 기도”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예수” 등 그 자체로는 너무 귀하지만 한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다른 한쪽은 소홀히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기독론”을 강조하다보니 삼위 일체적으로 균형 잡힌 영성수련에 취약하다.
다일영성생활 1,2,3 단계 수련은 조직 신학적으로 볼 때, 창조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종말론 등이 유기적으로 녹아져 있다.

좀 더 이 부분을 설명해 본다면, 1단계에서는 조직신학적으로 창조론, 특히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인간창조를 분명하게 깨달음에 이루도록 이끌어간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창세기 1장 31절의 말씀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아지는 경험으로 이끌어간다.
그래서 1단계에 참석하는 벗님들마다 1단계가 끝마쳐 질때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또한, 다일영성생활 수련 1단계는 인간론을 다룬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의 것인가?” 등의 화두를 지속적으로 스스로에게 묻게 한다.
이런 궁극적인 질문을 통해 형이상적인 인간론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하신 본질된 인간으로서의 “나”를 깨닫게 되어 자신과 이웃에 대하여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I am special” 과 “You are special”을 고백하게 한다.

다일영성생활 수련 2단계의 중심은 기독론이다.
그래서 2단계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품과 역량을 본받아 작은 예수로 살기위한 다양한 영적수련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기독교적 종말론에 기초한 유서쓰기와 임종체험 수련은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영적체험을 경험하게 한다.

다일영성생활 수련 3단계의 중심은 성령론이다.
1단계와 2단계에서도 깨달음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지만, 특별히 3단계에서는 대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단계에서는 기독교 영성에 뿌리박힌 다양한 기도훈련을 통해 성령님과 일상생활에서 동행하도록 돕는 수련이다.

이처럼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선을 굿듯 구분되어지지 않지만, 1단계는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께, 2단계는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님께, 3단계는 보혜사이신 성령님께 보다 집중하며 1,2,3단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삼위 일체적으로 균형 잡힌 영성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깨달음을 지향한다.

인도출신의 예수회 사제인 엔소니 드 멜로는 “영성이란 깨어남”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깨어남은 깨달음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 깨달음은 책을 통한 깊은 연구와 사색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최일도 목사님이 가장 밑바닥 인생인 청량리 588 근처 오갈데 없는 노숙자들에게 한 그릇 라면을 끓여 대접하는 삶의 한 복판에서의 처절한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다일영성생활 수련에서는 식사 시간이 없다.
“진지 알아차리기” 시간이 있을 뿐이다.
설거지라는 말 대신 “성자되기 첫걸음”이라고 부른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에서는 한 순간의 깨달음을 얻는 경험을 아멘과 할렐루야를 합쳐 “아하(Aha)"라는 외침을 통해 표현한다.
이런 아하 모먼트(Aha Moment)는 본질적인 화두를 반복적으로 묻고 또 묻는 과정에서 어느 한 순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의 깨달음을 경험하게 된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일상생활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열매를 지향한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하다.
세대가 다양하다.
20대부터 70대까지 참여한다.
교파도 다양하다.
1단계 아름다운 세상 찾기는 신앙이 없는 사람도, 천주교인도, 타종교인도 참여한다.
민족을 초월한다.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인도 참여한다.
그 다양성 가운데 일치되는 점은 참여하는 벗님들 모두가 변화를 경험한다.
이것을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사실의 세계에 눈을 뜰 때, 나를 넘어 이웃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다.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는 생각의 변화, 느낌이 변화, 그리고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무엇보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삶의 자리인,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먼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는 화해와 일치, 나눔과 섬김의 삶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가 다일영성생활 수련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기독교 영성수련으로서의 다일영성생활 수련에 대한 중요한 식별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마치면서

한국개신교는 선교 초기부터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원색적이고 강력한 영성을 바탕으로 일치성을 강조해 왔다.
반면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안에 면면히 흘러내려온 기독교 영성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 누리는데 인색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는 새로운 영적의 경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1999년 4월 5일,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 초라한 농가주택에서 최일도 목사님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된 다일생활영성 수련은 지금까지 국내에서만 1단계 130기, 2단계 41기, 3단계 13기까지 진행되었고 유럽과 미국에서 진행된 영성수련을 포함하면 모두 200회 가까이 진행되었다.
다일영성수련을 경험한 이들이 1만명이 넘는다.
카톨릭에서는 이냐시오 로욜라의 영신수련의 의해 기독교 신앙의 깊은 신비를 체험하고 있지만 한국 개신교 안에는 그와 같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공인된 영성수련의 장이 없던 때에, 다일영성생활 수련은 메마른 대지에 한줄기 빗줄기와 같이 한국 개신교회 영성에 밑거름이 되었다.
다일영성생활 수련이 완벽한 개신교 영성수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척박한 한국개신교회안에 다일영성생활 수련을 통해 주어진 영적인 부요함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일공동체의 영성

이강학 목사
Graduate Theological Union(기독교 영성, Ph.D.)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M.Div.)
서울대학교 기계설계학과 (B.A.)

나와 다일공동체: 첫 만남

한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되고 내 인생의 구주로 영접하게 된 나는, 평생 섬길 교회를 찾아 나섰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모델 삼아 내가 참여하고 싶은 교회의 기준 세 가지를 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 세 가지 기준은 첫째,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교회일 것, 둘째,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교회일 것, 셋째, 개혁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일 것이었다.
1991년 가을 어느 날, 나에게 <창세기>를 배우던 한 후배가 청량리에 있는 어떤 목사님과 그 교회를 소개했다.
그 후배를 따라 참여했던 첫 주일예배의 충격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마가의 다락방”의 한국판이라고 할 만한 청량리 역전 5층 상가 건물 옥탑에 있던 가건물, 카펫 위에 무릎 꿇고 앉은 서른 명 남짓 되는 사람들의 발 냄새, 성례전을 집례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엉엉 우시던 최일도 목사님, 축도 후 동그랗게 둘러서서 목사님을 따라 돌아가며 한 사람씩 반갑게 끌어 안아주던 성도들, 식사 후 다시 원을 그리고 앉아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예배당을 정리한 후 큰 국통과 밥통, 식기들을 리어카에 싣고 청량리 역전을 지나 공동체로 가면서 난생 처음으로 본 청량리 588 거리와 언니들, 언니들이 낚아채간 안경을 겨우 돌려받고 식은땀을 흘리며 공동체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성자되기 첫걸음은 설거지부터”라는 문구, 설거지를 마친 후 방에 들어가 차를 마실 때 천정에서 들리던 쥐들의 마라톤 소리.
나는 그 날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영성학자 샌드라 쉬나이더스에 의하면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 신앙에 기반 한 삶의 전반적인 경험”을 주 소재로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모든 삶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기독교 영성을 이해하려면 단순한 듯 보이는 이 표현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기독교 영성의 출발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또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기독교 영성이 된다.
3-4세기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사막으로 나가 평생을 살면서 예수님의 “청결한 마음”(the purity of heart)을 추구하던 안토니와 파코미우스를 비롯한 사막교부들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그 사막교부들로부터 큰 영감을 얻어 5-6세기에 이탈리아의 산에 정주수도원을 세우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과의 일치”(the union with God)를 추구하던 베네딕트를 비롯한 수도원장들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12-13세기, 부유해지고 타락한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예수님의 가난과 전도”(the poverty and evangelization)를 추구하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탁발 수도회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또, 중세에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의 고통”(the passion of Christ) 마저도 남김없이 맛 보기 원했던 시에나의 카타리나, 폴리뇨의 안젤라, 노르위치의 줄리안 등 여성 수도자들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16-17세기, 타락한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복음의 은혜성”(sola gracia)과 “성경의 중요성”(sola scriptura)을 강조했던 루터와 칼빈의 경험이 기독교 영성이다.
20세기 대표적인 기독교 영성은 서양에서는 본회퍼, 마틴 루터 킹, 테제의 로제, 마더 데레사, 한국에서는 길선주,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이현필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외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든 알려져 있지 않던 시대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아 살았던 “구름과 같이 허다한” 기독교 영성가들이 있고 그들의 경험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둘째,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이다. 믿음을 고백한 기독교인의 모든 경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가는 자신의 경험 자체를 공로화, 절대화하지 않는다.
다만, 겸손하게 광야에서 구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따라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고 성령이 일으키시는 깨달음과 마음을 따라갈 뿐이다.

셋째, 기독교 영성의 대상은 그 믿음 위에서 나오는 “모든 삶의 경험들”이다.
성령의 역사는 공간적으로 교회 안에만, 시간적으로 예배 시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영성에 예배가 중심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기독교 영성은 우리의 모든 일상도 성령이 활동하시는 영역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들꽃이 주는 깨달음, 한 마디 말이 가져 온 상처 또는 위로 등을 포함해서 우리 눈이 본 것, 우리 귀가 들은 것 등 외부에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 온 자극, 또는 우리 마음 안에서 스스로 일어난 느낌, 생각, 깨달음 등 모든 것 안에 잔잔한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내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엘리야가 들었던 잔잔한 바람 같은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침묵하며 모든 일상을 주시할 때 나오는 경험이다. 그 경험 안에서 일상은 신비가 되고 신비는 일상이 된다.

영성수련, 영성식별, 영성지도

기독교 영성생활의 목표는 전통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Union with God)에 있었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사신 삶의 모범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본받아 살려고 하는 모든 노력이 기독교영성생활의 주 내용이 되었다.
또 기독교 영성가들은 영성 생활의 과정을 이해하기 쉽도록 자신들의 경험을 근거삼아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 그리고 일치(unification)이다. 정화의 단계에서 나는 자유를 잃고 사는 나를 발견한다.
율법과 틀의 노예가 되어 사는 나를 발견한다. 이기적인 욕심,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발견한다.
상처투성이인 나를 발견한다.
동시에,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강한 욕망이 일어난다.
조명의 단계에서 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을 충만하게 경험한다.
이 때의 지식은 머리를 키우는 정보의 지식(informational knowledge)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을 포함해서 총체적인 삶을 변화시키는 영적 지식(transformational spiritual knowledge)이다.
일치의 단계에서 나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 하나님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관상(contemplation)할 뿐이다.
이 관상의 순간은 너무 짧기도 하고 너무 길기도 해서 세상의 시계로 잴 수 없다.

하나님과의 일치를 경험한 기독교 영성가들은 그 삶이 예수님을 닮아갔다.
그들은 많은 신비 체험을 하고 치유의 기적들도 일으켰지만, 더욱 스스로를 작다고 하며 겸손해졌다.
그래서 주변에 제자들이 모여들어 함께 살며 배우기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영적 스승에게 영성 생활에 대해 물었다: 특별히, 기도에 대해서, 공동생활에 대해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성령의 역사를 식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것이 영성식별(spiritual discernment) 과 영성지도(spiritual direction) 라는 오랜 기독교 전통을 만들었다.

영성식별과 영성지도는 “하나님과의 일치”(union with God)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기”(imitation of Christ)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모든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도구들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그리고 이냐시오 로욜라 같은 영성가들은 영성지도자의 도움 없이 영성생활의 성숙은 없다고 공히 선언했다.
또한 올바른 영성지도자를 찾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올바른 영성지도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듯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안내할 능력, 경험, 그리고 성품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영성지도자는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자기가 갔던 길만이 옳다고 모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서 그 사람을 어디로 부르시는가를 예민하게 살피고 그 부르심을 그 사람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친절하고 솔직한 표현으로 도와준다.
영성지도자는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다양한 기도의 방법을 알고 있고 그 사람에게 맞는 기도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 찾도록 도와준다.
영성지도자는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사람이다. 고정관념과 편견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들을 때, 상대방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공명할 수 있다.

영성식별은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지혜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영적 지혜이다.
영성식별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고, 영성수련을 통해 계발되기도 한다.
영성식별의 직관이 뛰어난 소수의 사람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영성수련을 통해 식별의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영성식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는 “영신수련”(The Spiritual Exercises)이라는 수련교본에서 “성찰 기도”(The Examination of Conscience) 와 “영성 식별법”(Rules for Spiritual Discernment)을 제시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종교적 정감”(Religious Affections)이란 책에서 미국 영적대부흥기(The Great Awakening)에 경험한 일들 중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종교적 정감의 특징 열두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Courage to Teach)를 포함한 여러 저작에서 퀘이커의 영성식별법인 “맑게하는 모임” 또는 “명료 위원회”(Clearness Committee)를 소개하고 있다.
영성식별의 요지는 결국 내 생각(thoughts) 과 느낌(feelings)의 근원(roots) 과 방향(direction) 을 알아차리는데(noticing) 있다.
“알아차리기”가 영성 식별의 주요 자료가 된다.
따라서, “알아차리기”는 가장 중요한 영성 수련들 중 하나가 된다.

다일공동체의 영성

다일공동체의 20년은 긴 기독교 역사의 지평에서 볼 때는 무척 짧은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20년 사이에 하나님이 다일공동체를 통해 일으키신 일을 보면, 기독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령의 역사를 집약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한국 기독교 영성사에 길이 남을 큰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다일공동체는 영성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기도와 실천 또는 관상과 실천(contemplation and action)의 균형을 잘 잡고 있다.

균형 잡힌 영성은 기독교 영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모든 존경받고 신뢰받는 영성가들은 기도와 실천에 균형이 잡혀있다는 특징이 있다.
혹자는 사막의 영성가들이나 봉쇄수도원의 영성가들이 세상을 도외시하지 않았는가하고 의문을 던지지만, 그들 역시 기도를 통해 교회의 일치와 세상의 정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알 수 없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깊이 있는 신비기도 체험의 소유자였지만, 부와 권력으로 타락한 수도원을 개혁하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실천에도 큰 역할을 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는 탁발수도회의 창시자로서 세상 속을 다니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지만, “태양의 노래”와 같은 기도문에 담겨있는 그의 기도의 깊이는 어느 사막 영성가, 봉쇄 수도원의 영성가 못지 않다.
봉쇄수도원인 트라피스트 겟세마니의 수도사였던 토마스 머튼은 전혀 신문을 읽지 않았지만, 그에게 기도와 영성지도를 요청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보낸 친구들의 편지를 통해, 누구보다도 세상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편지의 내용을 상황(context)으로, 기독교의 영성고전들(text)을 바탕으로 해서, 현대인이 폭력적이고 경쟁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영성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글로 써서 많은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끌었다.
본회퍼 역시 그의 저술 “Life Together”에 잘 나타나듯이, 깊이 있는 공동체 기도 생활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기 위한 비밀 공작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일공동체는 영성생활수련원을 통해 기독교영성사의 기도 생활 즉 관상 생활의 맥을 잇고 있는 한편, 밥퍼나눔운동본부와 다일천사병원 및 중국,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에 있는 공동체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영성사의 실천 즉 구제긍휼사역의 맥을 잇고 있다.

다일공동체의 영성은 기도와 실천의 균형을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와 실천 그 각각에 있어서도 기독교 영성사에 기반한 바른 기도의 길, 바른 실천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대다수 한국개신교인에게 “기도”는 무엇인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소리를 내서 하는 구송기도로서 집단적 통성 기도와 대화식 기도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내용에 있어서는 “주시옵소서!”를 강조하는 청원 기도가 주를 이루고 감사 기도와 찬양 기도가 보태지고 있다
. 기도의 도입으로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Quiet Time) 또는 찬송하기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의 전통에는 훨씬 깊이 있고 다양한 기도에 대한 이해와 방법들이 있다.

우선, 내 생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청원 기도는 기도의 주목적이 결코 아니다.
기도의 주목적은 “하나님과의 일치”에 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다.
그리고, 기도에 있어서 소리는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기도의 대부분은 침묵이다.
말을 하기 보다는 듣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기도의 시작은 성경 묵상, 기도문 암송, 성화관상, 자연 묵상 등에서 시작한다.
기도 시간에는 성경 묵상을 머리로 연구하고 따지기보다는 가슴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찾으려고 애쓴다.
시편이나 영성가들의 기도문은 좋은 기도의 안내자가 된다.
성화(icon)를 보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나 느낌을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기도 한다.
나무나 풀, 시냇물 소리가 기도의 좋은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기도의 수단들은 하나님과 머리로 만나는데서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만나도록 이끄는 수단일 뿐이다.(이 기도의 수단들을 넓은 의미로 영성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뒤로 하고, 내 생각과 느낌도 뒤로 하고, 마침내 하나님과 나만 함께 있는 상태에서 잠시나마 그 하나님을 지극한 사랑의 눈을 바라보며 만나는 것에 이른다.
이 상태의 기도를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라고 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사랑의 시선으로 오래 바라보기”(a long loving look at the real)라고 하기도 한다.

이 관상기도의 경험은 하나님을 아는 경험이기도 하고 나를 아는 경험이기도 하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 위한 경건 생활은 결국 바로 이 기독교 영성사의 깊은 관상기도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일영성생활수련원에서는 기독교영성사에 바탕을 둔 침묵기도, 예수호칭기도(Jesus Prayer), 거룩한 성경 읽기(Lectio Divina), 자연묵상 등을 소개함으로써 한국 개신교인들의 기도에 깊이와 넓이를 더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다.

다일의 영성은 바른 기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할 뿐만 아니라, 바른 실천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다일공동체가 처음 출발하던 80년대 시절만 해도,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은 실천이라고 하면 개인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 전도와 선교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이자 한국 복음주의 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친 빌하이벨스 목사의 고백을 필두로,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한 복음 전도와 선교는 영성의 천박성과 함께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한편 진보적 기독교인은 민중신학적 이념에 기반한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만이 진정한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는 실천은 그 명분이 아무리 올바르다고 해도 역시 그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
다일공동체는 말로만 전하는 복음 전도와 선교가 아니라, 청량리 윤락가 한복판에서 살면서 노숙자, 독거노인들에게 밥을 퍼주고 언니들을 감동시키며 말이 아닌 몸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다.
또 다일공동체는 운동권의 머리가 아니라 “생활권”의 가슴으로 사회의 밑바닥 생활에서부터 나오는 진정한 부르짖음을 대변했다.
다일공동체의 바른 실천에 대한 이런 끊임없는 질문과 응답이 오늘 복음주의적 기독교인과 진보적 기독교인의 공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다일공동체의 영성은 한국적 영성과 서양 기독교 영성을 적절하게 통합하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영성수련, 영성식별, 영성지도 등의 방법은 모두 서양 기독교 영성가들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다일공동체는 기독교 영성사에 있는 영성 수련의 방법들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현대 기독교 공동체들에도 관심을 갖고 교류를 하고 있다.
떼제공동체와 브루더호프공동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의 본질이 공동체성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 상처 받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음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일의 영성은 한국적 영성이다.
영성이 자기 중심성과 이기적 욕심을 초월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다룬다고 할 때, 그 경험은 다분히 기도하는 사람의 문화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이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경험과 서양 기독교인이 영적 감동을 받는 경험은 상당히 다르다.
문화심리학자들은 그 이유 중 하나로 서양인들의 자아(self)와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 사람들의 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든다.
서양인의 자아는 독립적(independent)이고 개인적(individualistic)인 반면, 한국인의 자아는 관계적(relational)이고, 의존적(interdependent)이고, 집단적(collective)이다.
한국인은 관계로 매이고 관계로 푼다.
관계에서 오는 한국인의 상처는 서양인에 비해 무척 심각하다.
“화병”은 한국인의 문화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병이라고 세계의학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다일영성생활수련에서 “화”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된 것도 “화”를 생성하게 되는 관계가 한국인에게 얼마나 심각한가를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 받는다면 한국인의 인간 관계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아울러, 인간 관계와 직결되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더욱 원활한 소통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일 영성의 한국적 특성은 “밥”이라는 낱말에 모두 담겨 있다.
다일의 영성은 “빵”의 영성이 아니라, “밥”의 영성, “진지”의 영성이다.
청량리의 “밥퍼나눔운동본부”에서 매일같이 최상의 쌀로 지어져서 나누어지는 “밥”에 다일의 영성이 담겨 있다.
또한, 다일공동체의 식사시간마다 드려지는 “진지기도”에 다일의 영성이 담겨 있다.
아울러, 다일 영성생활수련 때 행해지는 “진지 알아차리기”에 다일 영성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진지 상에 오른 알곡들, 채소들과 고기들의 색깔, 크기, 모양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살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결심하는 모든 경험이 지극히 친근한 한국적인 경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일의 영성은 그 이름 그대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영성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가 곧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다름이 곧 틀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일공동체는 내 기준과 고정관념으로 나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다름에서 오는 개성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 다름을 아름답게 조화시킬 수 있는 일치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다일의 영성이 지향하는 바이다.

웰다잉(Well-dying)으로 본 다일공동체의 영성

김경호 목사
전 건양대학교 겸임교수
대전 동안교회 담임목사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14:13 개역개정판)

들어가는 말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가 환자를 앞에 놓고 임종을 알리는 일이다.
의학적으로 분명히 며칠 밖에 남지 않았기에 온 식구들에게 통고한 의사조차도 막상 환자 당사자에게 전하는 것은 꺼린다.
물론 가족들은 너무 고통스러워 더욱 말하지 못한다.
자, 이런 경우 현재 상황을 알리는 것이 사랑이겠는가, 아니면 알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겠는가?
목회적 입장에서 보자면 알리는 것이 성도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은 시간에 죽음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독으로 만나 이 사실을 통고하게 된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그 역할을 맡는다.
“당신은 이제 의학적으로 얼마 동안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은 시간을 같이 준비하십니다” 이렇게 어렵게 말을 시작할 때, 본인이 이미 알고 있어서 “예,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을 준비는커녕 죽을 생각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가 왜 죽느냐고 오진(誤診)이 아닌가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현실을 긍정하지 않으려는 사람 앞에서 임종을 통고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더 괴로운 일은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니 기도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이다. 정말 답답한 시간이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능이란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도 전능이지만 산 사람 데려가시는 것도 전능이다.
어째서 살리시는 것만 전능인가? 살아 있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늘나라로 옮겨놓으시는 것도 큰 전능임을 시인해야 한다.
죄인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는 것보다 더 큰 전능이 어디에 있는가?
지옥에 갈 사람을 천당에 보내는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권능은 없다.
아무튼 임종을 알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괴롭고 힘든 일이지만 또한 중요한 일이다.

인간의 죽음이란 어느 한 순간에 정확히 일어나는 사건이라기보다 삶의 종점으로 나아가는 길고 긴 지속적인 과정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죽음 또한 일회적 삶을 사는 인간에게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삶이 의미 있는 자에게는 죽음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정신병리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층에서는 자기 자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죽을 병이라는 진단이 확실해져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한계 상황에 처하게 되면 갑자기 삶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게 되고 자신에 대한 존재 가치와 생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임종을 앞에 둔 사람에 대한 신앙적 돌봄은 매우 중요한 역할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그들을 돕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임종을 앞에 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염려하듯 죽음에 대한 사유를 기피하고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비현실적인 기대에 야합하여 목회자가 죽음에 대한 분명한 자세가 결여된 채 병이 치유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며 그 환자에게 행복이라는 전제하에 접근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신앙적 돌봄이라고 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다가오는 현실, 그 자체에 솔직하고 용기 있게 맞서서 죽어가는 그 시간도 한 인격자의 가치 있는 삶의 과정이며 인간적, 신앙적으로 성숙을 향한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하여 그에 적합한 신앙적 돌봄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죽음의 의미에 대한 분명하고 근거 있는 이해를 갖춰야 할 것이다.
또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죽음 후의 삶이 결정된다기보다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니 죽음을 바로 이해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의 바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의 바른 삶을 위한 죽음의 이해와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이 그들의 마지막 삶의 과정을 잘 마무리하도록 이끌기 위한 기독교적 바른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웰다잉(Well-dying)이란?

의료 기술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고령화 시대가 되었다. 고령화가 되었다는 것은 노년기가 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것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기간이 그만큼 길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편안히 잘 죽는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웰다잉(Well-dying)이란 인생의 마무리를 밝고 아름다우며 품위 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즉 장수가 의미 있으려면 단순히 수명만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활기차고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가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웰다잉(Well-dying)은 무엇인가? 그것은 편안하게 잘 지내다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편안한 죽음을 넘어서 참된 웰다잉(Well-dying)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확신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삶과 죽음과 연관하여 두 가지 Well('잘‘ 또는 ’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바람이 불고 있다.
하나는 웰빙(Well-being/잘 살기)이고, 또 하나는 웰다잉(Well-dying)이다.
그러면서 인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윤택한 삶과 긍정적인 죽음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웰빙(Well-being)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진 삶의 한 틀을 이루어가고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즉 바른 먹을거리를 통해서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이 사회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육신적 웰빙(Well-being)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육신의 풍요로운 삶을 뛰어넘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하게 된다.
성경적 웰빙(Well-being)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넘어서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신체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 안녕 상태를 말한다“(WTO 1998): 진정한 건강은 영적인 영역도 포함된다.
본고에서는 웰다잉(Well-dying)으로 본 다일공동체 영성을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웰빙(Well-being)에 대한 이야기는 본 책에 수록된 오성춘 목사의 웰빙(Well-being)에 대한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웰다잉(Well-dying)은 웰빙(Well-being) 바람이 일면서 꼬리를 물고 나온 것이다.
사실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일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니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리도전서 2:14)
웰다잉(Well-dying)은 이러한 삶과 죽음의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하든지 잘 풀어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바람이다.
그러기에 웰다잉(Well-dying)의 목적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이들과 곧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에게 죽음에 대한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어 누구나 맞이해야할 죽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을 살아있는 동안 평안한 마음으로 잘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된다고 사후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웰다잉(Well-dying)은 죽음에 대한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을 넘어서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사후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3절을 통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여러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훈련을 받고 제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다고 해도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으면 그 마음의 준비는 무의미하 뿐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요한계시록 20:15)
죽음은 지상 순례의 마지막, 즉 자연적이며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다.
동시에 교회는 죽음은 영원한 나라로 향하는 관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믿는 자의 죽음은 복된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존재를 거짓없이 바라보게 하며 인간 실존의 깊이와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한다.
따라서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바른 태도이다.

웰다잉(Well-dying)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웰빙(Well-being)은 삶에 관한 것이기에 그런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을 제시한 자료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과 연관하여 이야기되는 웰다잉(Well-dying)에 관한 이야기는 깊이 계속되어야 한다.
웰다잉(Well-dying)이 필요한 것은 첫째 우리 주변에서 죽음에 대한 소식을 종종 접하기 때문이다.
많이 듣고 경험하는 죽음임에도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둘째로 죽음은 바로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그 시기와 형태를 모를 뿐이지 누구나 경험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셋째 죽음의 순간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을 때 공포 없이 자기의 감정을 조절하고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고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죽음 후의 삶이 있음을 알고 준비하여 소망 가운데 영원한 삶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죽음의 준비를 위해서 죽는 순간까지 평생을 꾸준히 실천해야 할 과제로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지침을 제시하고자 한다.

01. 의학적으로 더 이상 치료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죽음 방식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겠다는 의사를 의료진에게 표명해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사전의료지시서’를 작성할 수 있다. 그것은 무의미한 치료의 중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구차한 연명이 되지 않도록 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다.

02.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하루의 삶을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자. 주님은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잠은 짧은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잠을 통해서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다. 언제 주님께서 부르시던지 또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던지 언제나 종말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다.

03. 각자의 형편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정기적으로 유언장을 써 놓는다. 주기적으로 유언장을 다시 읽어 보고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다시 작성할 수 있다. 살다보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세상르 떠나는 경우도 있으니 진지하게 죽음을 가정하면서 작성한다.

04. 사후에는 다양한 절차에 의해서 장례가 치러진다. 그러므로 본인이 원하는 장례 예식의 절차를 비롯해서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 등을 미리 가족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각 종교에 따른 예식 절차가 있으며 시신 처리 방법에는 화장, 매장, 수목장, 장기 기증, 시신 기증 등의 다양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05. 매일의 삶을 성실하게 살자. 존 웨슬리에게 어느 젊은이가 물었다고 한다. “만약에 내일 밤 12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지금부터 그 시간까지 무엇을 하겠습니까?” 존 웨슬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할 것입니다”라고 매우 뜻있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이제 죽음을 통고받았다 해서 새삼스럽게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대로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늘 죽음을 준비하고 사는 삶이다.

06.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명랑하고 밝게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가능하다면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본다던지, 자살 예방 운동에 참여한다든지 하여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 하겠다. 또한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다.

07. 매일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앙으로 주님께 나아가며 준비함도 필요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 후의 삶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죽음 후에 또 다른 삶이 있으며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한 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요, 영원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08. 용서를 습관화하자. 예수 그리스도도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옆구리를 창에 찔리셨을 때, 물과 피를 쏟는 그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시며 성령에 충만하셨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최대의 하이라이트는 ‘용서’이다. 모두 용서함으로 후회 없는 삶을 준비하자.

09. 죽음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죽음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올바른 인식함으로써 삶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새로 발견하고 가치관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죽음 교육은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생명 중시 가치관을 평생 교육 안에 심화한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10.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자. 주일 지키는 것도 일종의 죽는 연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주일만 되면 모든 일을 중단(all stop)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다. 어차피 부르시면 다 중단하고 가야 하지 않는가? 주일을 지키는 것이 세상 일을 중단하는 훈련이므로 죽는 연습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자는 것이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웰다잉을 위한 죽음 준비 교육은 매우 필요하며 유익하다.
그 유익은
첫째 인생을 배우게 해 준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들도 결국은 죽게 된다.
이 땅에 욕심을 부리고 살았던 사람들도 하늘나라로 간다.
뽐내며 살았던 사람들도 간다.

둘째로 나에게 장차 올 죽음을 준비하게 해 준다.
언젠가는 내게도 죽음의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

셋째로 영적 성장의 계기가 된다. 여러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이 땅에서의 사명을 반성하게 된다.
그러면서 남은 시간을 신앙 안에서 계획하고 다짐하게 된다.

넷째로 죽음은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가르쳐 준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야 할 곳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야 할 곳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죽음은 인생의 훌륭한 스승이다.
죽음을 슬퍼만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죽음을 직면하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다.

웰다잉(Well-dying)의 모범이시며 해결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누구를 본받아 닮아갈 것인가?
성경은 히브리서 2장 15절을 통해서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셨다.
성경은 인간이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사실은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 자체가 죽음을 전제로 오신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장 28절, 마가복음 10장 45절)

죽음을 전제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33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사셨지만 사시는 동안 당신의 죽음을 철하게 준비하셨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당신이 하시던 사역이 계속되도록 그 일을 이어나갈 제자들을 양육하셨으며, 남은 가족의 살길까지도 남은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등 빈틈없는 마무리를 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찾아와 두려움에 죽음을 거부하는 이들의 비참한 임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상되었던 죽음이요, 철저하게 준비된 죽음이었기에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장 30절)라고 말하시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도 잠시 동안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피하시고자 하셨지만 결국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종을 다짐하며 죽음 앞에 당당해지셨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소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 (마가복음 14장 36절)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죽음이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장 23절)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이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잘 아셨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여러 번 예고하셨으며 준비하셨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고,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인데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즉 구원의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구원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죽음에 관한 문제가 그 분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해결되었음을 믿음으로 궁극적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가된 그리스도인들도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사실 신앙으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현상적인 죽음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죄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이들이 당하는 두려움이나 고통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죽음의 과정을 좀 더 의연하게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장 55절~58절)

성경은 죽음 준비를 자주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시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친히 본으로 보이셨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천국의 비유 등을 통해서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도록 가르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일생을 죽음의 공포에 매여 살아야하는 인생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기에 진정한 죽음의 준비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세상 너머의 세계에 대한 보장을 받았기 때문에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으며, 죽음의 순간이 이생에서의 삶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가는 과정임을 믿기에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의 본질적인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과 기대로 생명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요한복음 5장 24절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는 말은 소망을 주는 좋은 소식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죽음 이후의 삶을 약속하셨으며 그 삶은 이생에서의 삶보다 더 좋은 삶임을 분명히 밝혀주셨다.
죽음 이후의 삶을 소망으로 소개할 때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삶은 소망으로 바뀌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죽음을 피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웰다잉(Well-dying)으로 본 다일

이제 다일공동체의 영성을 웰다잉의 관점으로 보고자 한다.
오늘날의 세계 문제는 결국 서로가 조금 더 차지하고 혼자 더 먹겠다고 욕심 부리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분배 문제 때문에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다.
절대적 빈곤의 해결이 중요한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먹는 것이 중요하고 입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해결되고 나면 상대적 빈곤이라는 큰 문제에 부딪힌다.
사람이 배가 고플 때에는 먹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가 됩니다만, 사실은 배고픈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오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즉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차이가 나는 생활수준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집이 없이 이리저리 셋방살이 다니는 사람들은 비록 작은 집이라도 내 집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다.
그러다가 막상 조그마한 집을 가지게 되면 이번에는 남의 집에 비해 너무 초라한 내 집이 못마땅해진다.
절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민은 육신의 고통이지만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민은 마음의 아픔이다.
절대적 빈곤에서는 몸이 죽고 상대적 빈곤에서는 기(氣 )가 죽는다.
마음이 죽고 기가 죽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우리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들이 우리 앞에 첩첩이 쌓여 있다.
그것을 내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상대적 빈곤의 문제가 해결되어 안정되고 보면 그 다음에는 또 정신적, 문화적 빈곤의 문제가 고개를 쳐든다.
아울러 더욱 엄청난 문제, 곧 도덕적 빈곤의 문제가 밀려온다.
알코올과 마약이 인성(人性)을 파괴한다.
복마전(伏魔澱)을 능가하는 온갖 퇴폐와 타락이 판을 친다.
도덕적 빈곤의 문제와 아울러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생긴다.
소위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된 복지 국가들을 한번 살펴보자.
예배당은 크게 지어 놓았는데 교인이 없다.
교회가 텅텅 비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멀리 내다볼 때에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잘살아 보세를 외치며 경제 문제만 풀면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이제 상대적 빈곤의 문제, 인권 문제, 문화적 빈곤의 문제, 도덕적 빈곤의 문제, 나아가 영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겹겹이 가로놓여 있음을 예견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다일공동체는 성장하면서 그러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기 위하여 사역을 넓혀간 것을 볼 수 있다.

다일공동체가 스스로 말하는 다일공동체의 영성을 보자.

다일공동체의 영성
다일공동체는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1. 나사렛 예수의 영성생활을
2. 예배예전의 갱신으로 성사생활을
3. 일하며 기도하는 공동생활을
4. 나누며 섬기는 봉사생활을
추구합니다. 이를 통하여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함께 성숙하며 섬기는 작은 예수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 땅에서부터 실현하고자 합니다.

다일공동체는 자신들의 영성을 위의 네 가지 정신이라고 말한다.
네 가지 생활 방법을 통해 이 땅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감으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그들은 오늘도 몸부림치고 있다.
다일공동체의 처음 시작은 청량리역에서 라면을 대접하는 밥상공동체로 시작했다.
나눔으로 그 출발을 한 것이다.
나눔이라고 하는 것은 다 놓고 가야 하는 우리들의 삶이기에 놓고 가는 삶의 훈련인 나눔에 익숙해야 한다.
그런데 이 나눔이라는 것이 바로 빈곤의 문제 절대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다일의 밥퍼 사역은 무료배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무료로 밥을 나눠드리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밥값을 받고 있다.
한그릇에 100원씩 자존심 유지비를 밥값으로 받고 있다.
처음부터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다일공동체가 절대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넘어서서 상대적 빈곤의 문제, 인권 문제, 문화적 빈곤의 문제, 도덕적 빈곤의 문제, 나아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밥퍼나눔운동, 다일천사병원, 자연치유센터, 다일평화인권연구소, 예향어린이집과 해외의 분원을 통해서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나 다일천사병원을 통해서 치료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무수한 생명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의료 사역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환자들의 육신의 건강만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임종을 앞둔 이들을 위해서는 호스피스 사역을 통해서 죽음을 준비하게 하며 장례식장을 갖추어 그들의 죽음 후의 절차까지 감당하고 있다.
물론 복음을 제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여 죽음 후의 세계도 준비하도록 천국의 길로 안내를 한다.
아무런 보상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묵묵히 봉사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수고와 섬김이 다일공동체를 지금까지 있게 했다.
또한 자연치유센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영성수련과 침묵수련은 웰다잉을 위한 좋은 경험의 준비가 되고 있다.
과정 중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프로그램의 특성상 미리 밝힐 수는 없지만 앞에서 제시한 웰다잉(Well-dying)을 위한 지침과 정신들이 영성수련 과정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웰다잉(Well-dying)을 집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제안을 한다면 죽음의 문제만을 가지고 일일영성수련을 진행해 보면 어떨까 한다.
다일공동체가 아직도 감당해야 할 사역들이 많지만 배고픔의 문제,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쓰면서 영성의 문제를 놓치지 않고 꾸준한 훈련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본인은 다일공동체의 힘은 영성수련을 통하여 뿜어나는 영성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번에 다일공동체는 더욱 철저한 영성 생활을 위해 평화의 집과 다일DTS (DTS: Discipleship Training School의 약자) 훈련원을 개원하여 종말론적 영성과 삶의 영성이 어우러진 건강한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을 양육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받는 훈련을 통하여 진정한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